생일선물을 고르는 것은 원래 쉽지 않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히카르도의 고민은 다른사람들보다 가일층 치열했다. 토마스와 히카르도의 성향차이-아니, 자라온 환경의 차이 때문이었다. 히카르도가 으레 생각하는 선물 카테고리는 값비싼 술이나 귀금속, 주식이나 채권, 혹은 적대세력의 몰락 소식 따위의 돈냄새 내지 피비린내를 품고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히카르도가 보아 온 바로는 토마스에게 그런 것들은 결코 선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그렇지만 꽃 따위로 대충 때우는 것은 절대 안될 말이다. 히카르도는 꽃다발을 제안한 부하를 굴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히카르도의 선물은 부담스럽지 않아야 했고, 그 누구의 선물보다 값지고 기뻐야 했다. 히카르도는 토마스가 자신에게 그러하듯이 토마스에게 자신이 큰 의미이길 바랬다.
“형님. 그냥 하루동안 카드를 빌려주는건 어떻슴까? 한도 없는걸로요.”
히카르도에게 시달린 나머지 퉁퉁하던 얼굴이 반쪽이 된 부하 하나가 툭 던졌다. 히카르도는 반사적으로 명패를 움켜쥐었다가 멈칫했다. 히카르도의 손놀림을 보고 죽었다고 복창할 준비를 마쳤던 부하는 잠시 미뤄진 처분 시간 사이에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가지고싶은데 너무 비싸서 포기한게 있을지도 모르지않슴까!! 히카르도는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고급스러운 금박봉투로 포장된 신용카드가 토마스의 눈앞에 찬란한 자태를 뽐내게 되었다.
“정말 사고 싶은거 아무거나 사도 돼요?”
“얼마든지 다 사도 된다.”
“진짜요?”
히카르도는 무게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의 눈은 때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애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밤 토마스는 히카르도의 곁에 누워 한참을 재잘재잘 떠들다가 제풀에 곯아떨어졌다. 히카르도는 다음날 아침 아이디어를 제공한 부하에게 꽤 아끼는 술을 한 병 선물할 정도로 즐거웠다. 히카르도에게 친히 술을 선물 받은 부하가 선망과 질투어린 눈을 한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시끌벅적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히카르도의 휴대폰에 결제내역 알림 문자가 날아왔다. 팝업창을 확인한 히카르도는 여유롭게 휴대폰의 잠금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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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마트.
결제내역 : 58,000
적립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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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지? 지나치게 현실적인 동시에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내역이 준 충격은 꽤 컸다. 히카르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셋까지 세고 다시 눈을 떴지만 문자 내역의 텍스트가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띠링! 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 생활비 카드를 두고 나가서 잠시 사용한 모양이다. 이번에는 선물을 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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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0소.
결제내역 : 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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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카르도는 지금 당장 토마스에게 전화를 걸어 마트를 사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부디 다음 결제 내역은 10만원을 넘었으면 좋겠는데. 히카르도는 어느새 안절부절 못하며 휴대폰의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애타는 바람이 무색하게도 결제 내역이 추가로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토마스는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사람이 6시 이전에 퇴근을 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성실한 성미였다. 히카르도는 몇 달 전 농땡이를 조퇴로 포장했다가 울기 직전인 토마스에게 이끌려 병원에 끌려갔고, 차마 농땡이라는 말을 하지 못해 진단서를 조작할 수 밖에 없었던 치욕을 곱씹으며 시계가 6시를 가리키기만을 기다렸다. 흉흉한 분위기를 온몸에 두른 행동대장을 보며 부하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며 행동대장 대신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6시가 되자마자 문을 부술 기세로 뛰쳐나가는 히카르도의 앞길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목숨은 하나뿐이며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부리나케 집에 도착한 히카르도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달짝지근한 냄새였다. 익숙하고, 때때로 간절해지지만 토마스가 힘들까봐 말하지 못한 바로 그 냄새였다. 부엌으로 향하는 히카르도의 어깨에는 어느새 힘이 빠져 있었다.
“으악, 안돼요. 히카르도씨! 아직 다 안됐어요!”
그러니까, 굉장한 풍경이었다. 히카르도는 토마스에게 등떠밀려 거실로 쫓겨나기 전, 찰나간 보았던 광경을 되새겼다. 윤기 흐르는 갈색 반죽이 가득 담긴 은색 보울과 크림이 빵빵하게 들어있는 짤주머니, 잘 다듬어져 준비된 과일더미와 부드러운 노란빛을 띤 손가락 사이즈의 치즈케이크가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는 오븐용 철판, 초콜릿 코팅을 씌운 둥그런 케이크까지. 히카르도는 그제야 토마스가 마트와 생활용품점에서 무엇을 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히카르도는 입가를 꾹 눌러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예전에 토마스가 등록금을 벌어야 한다며 빵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매일매일 지쳐서 곯아떨어지던 토마스를 보며 그깟 등록금 내가 다 대주겠다던 말이 얼마나 간절했던가. 그러나 히카르도는 빵을 만드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다며 웃던 토마스의 미소 때문에 말리질 못했다. 그리고 히카르도는 다시 한 번, 괜히 입방정을 떨지 않은 과거의 자기 자신을 칭찬했다.
토마스는 적당히 식은 핑거푸드와 파이, 그리고 브라우니로 삼단 빵 보관함을 가득 채웠다. 능력탓인지 수시로 허기를 느끼는 히카르도를 위해 토마스가 구매한 물건이었다. 야무지게 움직여 부엌을 정리하며 히카르도를 꼼짝 못하게 만들던 토마스는 최선을 다해 장식한 자허 토르테의 커팅식까지 선보였다. 도톰한 초콜릿 코팅은 마법처럼 부드럽게 잘렸다. 어때요? 맛있어요? 맛이 없을 리가 있나. 히카르도는 기꺼이 케이크 한 조각을 깔끔하게 해치웠다. 토마스에게 생일 선물로 준 것인데 히카르도 바레타가 생일케이크를 받은 것처럼 되었다. 히카르도가 슬쩍 눈치를 살필 때, 토마스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봐요.”
“나야말로 생일 선물을 한 번 더 받은 기분이군.”
토마스는 쑥스럽게 웃더니 따로 챙겨둔 간식거리들을 히카르도 쪽으로 내밀었다. 달콤한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토마스가 굳이 설탕과 초콜릿 범벅인 것들 위주로 만든 이유를 히카르도가 모를 리가 없었다. 히카르도는 기꺼운 마음으로 준비된 행복을 즐겼다.
“고마워요, 히카르도씨.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히카르도 역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애인은 아직도 종종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 히카르도를 놀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