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토마]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거예요
+ 스터디
+ 새드엔딩. 마틴 늘 미안해 ㅎ
+ 스터디 주제에 전에 트위터에서 썰풀었던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거예요] 라고 말하는 마틴 썰을 더함.
+ 주제 이미지 :
토마스는 특히 공놀이를 좋아했다. 그러나 공놀이는 혼자서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부모님은 일을 하러 나가셨고 친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괜히 신발코로 놀이터의 흙을 파내던 어린 토마스는 덩그러니 놓여있던 공을 툭 찼다. 둥근 공은 놀이터의 요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저 멀리까지 굴러갔다. 토마스는 뒤늦게 공의 뒤를 쫓아 달렸다. 아이의 짧은 다리에 따라잡히기 전에, 공은 낯선 신발에 부딪쳐 멈췄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매끈한 구두였다. 구두의 주인은 공을 주워 토마스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아직 혀짧은 소리가 다 가시지 않은 발음으로 공을 안고 인사했다. 나이가 어려 자세는 아직 어설펐지만 태도만큼은 진지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좋은 부모를 만난 모양이다. 마틴은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마음이 놓이니 미소도 더욱 자연스럽게 지어졌다.
“착한 아이군요. 이름이 뭐죠?”
토마스는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토마스는 마틴을 처음 만날 때 마다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낯설음과 동시에 기시감과 반가움을 동시에 겪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틴은 토마스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그리고 대답을 해주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러나 좋은 부모님 아래서 잘 교육받은 아이는 의문보다 질문에 답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토마스 스티븐슨. 다섯 살이에요.”
아이는 오른손을 쫙 펼치며 말했다. 그 바람에 공을 놓쳐 마틴이 다시 주워줘야 했다. 마틴의 입가는 미세하게 굳어있었다.
끝은 이미 예고되어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
으레 작은 마을은 서로의 가정사를 속속들이 알고있고, 그런 만큼 어느정도의 폐쇄성을 띤다. 그러나 이번에 마을로 흘러들어온 외지인은 아무렇지 않게 마을에 녹아들었다. 수완이 대단하다며 혀를 차던 사람들의 입가에도 은근히 미소가 떠올라 있곤 했다.
마틴 챌피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하긴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해온 일인데 익숙하지 않다면 그게 더 문제이지 않은가.
*
마틴은 기나긴 생애동안 몇 번 쯤 동족과 만났다. 그들 모두 자신의 고독을 달래는데 바빠 동족에게조차 무관심하며 예의상의 안부만 묻고 지나가는 정도에 그쳤다. 마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처없이 헤메다가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삶. 마틴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태어난 동족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동족들중에서도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자들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마틴은 지금껏 지상을 밟은 그들 중에서 가장 많은 동족을 만나본 자일 것이다. 죽은자들은 모두 기나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시간에 풍화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마틴의 일생은 인간에 비하면 영겁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시간은 더께가 되어 어깨 위에 쌓인다. 마틴이 보낸 하루가 돌멩이 하나가 된다면 마틴은 진작 조약돌로 이루어진 산을 짊어지고 다녀야 했을 것이다. 마틴은 동족들 중 아무도 견뎌내지 못한 것들을 견뎌내었다. 모두 토마스 스티븐슨이 해낸 일이었다.
*
마틴 챌피는 어린 토마스 스티븐슨을 품에 안고 속삭였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거예요.”
그리고 그의 말대로 되었다.
*
홀로 떠돌던 마틴은 어느날 죽음을 직감했다. 너무나 큰 공허가 뱃속을 갉아먹어 덩치를 불렸다. 이제 마틴 챌피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다. 끝이 가까웠으나 아쉬움은 없었다. 도리어 지나치게 오래 투병한 사람이 느낄법한 절망과 후련함이 혼재되어 소용돌이쳤다.
괜찮으세요?
마틴은 무심코 그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삐걱삐걱 뇌세포가 움직여 음절을 해석해냈다. 괜찮냐고? 그럴 리가. 마틴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답을 할 기력은 없었다. 이제 마틴 챌피라 할 만한 것은 한줌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마틴은 맥없이 눈을 감았다. 손끝이 단단하지만 따스한 손이 마틴의 뺨에 닿았다.
그렇게 깨진 틈새로 빛무리가 새어들어왔다.
마틴은 그 날을 결코 잊지 못했다. 토마스 스티븐슨은 그렇게 마틴 챌피를 되살려냈다. 마틴은 토마스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때, 함께 저녁 산책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 주말 아침에 그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서 노닥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나를 살려낸건가요? 토마스는 또 영문모를 소리를 한다며 웃었다. 그저 자신은 힘들어보이는 사람을 도와준 것 뿐이라는 상투적인 대답이 마틴을 제대로 납득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틴 챌피에게 토마스는 생명이었고 기적이었으며 구원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토마스는 부담스럽다면서도 쑥쓰러운 듯 웃곤 했다.
그러나 행복은 짧았다. 마틴 챌피의 삶에 비하면 토마스의 삶은 성냥이 타들어가는 시간 수준밖에 안된다. 그러나 마틴 챌피는 성냥이 준 온기를 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옥에서만 살았다면 그곳이 지옥인줄도 몰랐겠지만 이미 마틴은 천국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 그가 없는 삶은 상상만으로도 마틴을 겁에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어떻게 하죠.”
죽어가는 토마스의 눈빛과 말이 마틴 챌피의 모든 망설임을 끊어냈다. 마틴 챌피는 불완전한 영원을 사는 대신 단 한번 살고, 인간은 금새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거듭 되풀이해서 태어난다. 마틴은 토마스의 영혼에 흔적을 남기고 죽음을 조금 앞당겨주었다. 그 행위를 안락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뒤로 마틴의 삶은 짧은 행복과 기나긴 수탐의 연속이 되었다.
마틴의 표식을 지닌 인간은 남자였으며, 여자였으며, 영웅이었으며, 예술가였으며,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고, 청소년이었으며, 중년이었으며, 때로는 임종을 앞둔 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마지막에는 마틴 챌피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틴 챌피는 그의 모든 시간을 속박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그 안에 기쁨이 포함되어 있음 부정할 수 없었다.
*
“그거 알아요? 가끔 당신 등 뒤에 날개같은게 보여요. 하얗고 아주 큰 날개.”
“안개빛 날개 말하는거예요? 뭐, 예쁘네요. 그렇게 크진 않지만.”
“색? 약간 그거 색깔이죠. 예배 드릴 때 피우는 향 연기 색. 그런데 어디 아파요? 상태가 좋아보이진 않네요.”
마틴의 날개는 마틴 챌피 본인이 아니라면 그-혹은 그녀만이 볼 수 있다.
그녀가 캔버스 위에 재현한 마틴의 날개는 거뭇거뭇하게 시들어있었다.
*
어린 아이는 유달리 마틴 챌피를 따랐다. 부모 역시 마틴을 신뢰해 그를 대부로 삼았다. 토마스에게 마틴은 조금 늦게 만난 새로운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안타깝게도 토마스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부부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임종을 맞이하는 바람에 마틴 챌피가 토마스의 보호자가 되었다. 마틴은 토마스의 것이 된 재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겉모습이 스물 중반인 마틴 챌피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토마스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 젊은 청년이 아이를 맡게 된 상황인지라 마을의 누구도 갑작스러운 이사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진 않았다.
그의 이번 이름은 토마스 스티븐슨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동일한 이름이다.
마틴은 스티븐슨 부부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건드려 인공적인 호감을 끌어내고 마틴 챌피를 토마스 스티븐슨의 대부로 삼도록 했다. 만난지 몇 년 안된 사람에게 아이의 보호자 자리를 부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마틴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입맛에 맞춰 바꾸고 조종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마틴에게 호감을 내비치고, 기꺼이 자기 자신의 것을 마틴에게 내어주었다. 그러나 마틴은 토마스 스티븐슨에게 만큼은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모든 것은 토마스를 얻기 위해서였다.
토마스 스티븐슨은 어른이 되었고, 마틴 챌피를 받아들였다. 또다시 행복을 맛볼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틴 챌피는 불현 듯 두려움에 사로잡혀 눈물을 터뜨렸다. 마틴 챌피는 너무나 많은 토마스 스티븐슨을 잃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치부해버린 상처는 거듭 쌓여 회복될 수 없는 흉터가 되었다. 토마스가 죽음을 맞을 때 차라리 같이 죽으며 거듭 최후를 맞이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또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릴거죠. 마틴의 외침은 처절했다. 토마스의 무릎에 엎드려 울부짖는 마틴의 맨등에는 말라붙은 나뭇가지처럼 새카맣게 뼈대만 남은 날개가 뻗어있었다. 어떻게 달래야 할까. 달랠 수는 있는걸까. 토마스는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마틴을 품듯 허리를 숙여 끌어안았다.
마틴은 요구했다.
당신이 주었으니 당신이 거두어 가세요.
눈물과 섞여나온 바램은 토마스에게 지나치게 잔인한 것이었다.
마틴은 오랜 시간동안 홀로 상처받아왔다. 토마스는 마틴을 위해 아주 큰 상처를 각오했다. 새파랗게 번득이는 칼날은 충분히 날카로웠다.
*
토마스는 낡은 목도리로 목을 감싸고 묘비를 내려다보았다. 찬바람이 불었다. 묘를 충분히 정리해둔 덕택에 묘비에 검불이 앉는 일은 없었다.
묘지를 떠나는 발걸음은 서두르는 일 없이 평온했다. 묘지의 입구에 잎을 모두 떨군 검은 나무가 보였다. 토마스는 흐린 시선으로 나무를 응시했다. 마음 한 구석이 잘려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