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마흐] 오 나의 주인님
+ 원작 : 장국의 알타이르
+ 아빌리가 x 마흐무트
+ 키잡 요소가 약간 섞여있습니다.
+ 유령님과 풀었던 썰로 연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빌리가 등장씬은 유령님의 https://twitter.com/ecritere9/status/813739739534630912 <<< 요 연성에서 따왔습니다!
오래 전, 흡혈귀를 죽인 인간이 있었다. 단신으로 흡혈귀의 성에 쳐들어가 우두머리를 죽인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그럴듯한 작위와 부인을 얻어 귀족가문을 이뤘다.
흡혈귀의 생태는 벌이나 개미와 비슷하다. 강력한 흡혈귀 한명이 자신의 피를 감염시켜 만들어낸 ‘자식’들은 우두머리를 주인이나 부모처럼 믿고 따르며 클랜을 이룬다. 인간의 손으로 부모를 잃은 흡혈귀들은 일부는 정처 없이 떠돌다가 태양 아래서 소멸했고 일부는 인간에게 사냥당했으며 일부는 다른 클랜에 몸을 위탁했다.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아빌리가는 달랐다. 흡혈귀는 태양빛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부모’의 부름을 거부하고 떨어져나와 새로이 클랜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빌리가는 낮의 산책을 즐기는 기이한 취미의 소유자이면서도 결코 자신만의 클랜을 만들지 않았다. 그토록 깊은 애착, 혹은 집착. 아빌리가는 흡혈귀살해자의 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죽은 이는 잊으라 하는 자가 수십이었고, 미련하다 혀를 차는 자가 수백이었다. 아빌리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년은 10년이 되고, 10년은 100년이 되었다. 아빌리가는 흡혈귀살해자의 모든 자손을 지켜보았다.
그의 주인은 죽기 직전 흡혈귀살해자의 혈관 안에 자신의 피를 주입했다.
아빌리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몇방울의 피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지레짐작했다. 그는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셈이었다. 아름다운 아내와 건강한 자식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아기가 홀로 잠든 침실로 숨어들었을 때, 그리하여 숨골도 채 닫히지 않은 부드러운 정수리에 손을 얹었을 때.
아빌리가는 깨달았다.
그가 무시했던 몇 방울의 피. 흡혈귀 사냥꾼의 상처 주변을 시퍼렇게 물들이던 피는 착실하게 인간의 혈통을 잠식하며 힘을 키우고 있었다. 세대를 거듭하여 흡혈귀의 인자가 인간의 혈통 속에 완벽하게 안정을 찾는 날이 온다면, 어쩌면.
어쩌면 주인의 혈통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새끼를 여럿 낳는다. 아빌리가는 인간 아이가 둘 이상이 될 때를 기다려 꼭 하나를 남기고 죽였다. 죽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나 미약하게 흡혈귀의 인자를 보유한 수준에 불과한 어린 아이들은 아빌리가의 ‘유도’를 견뎌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의 과학이 발전하고 영아 사망률이 크게 떨어지는 시기가 되더라도 흡혈귀 사냥꾼의 아이들은 번성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런’집안이라고 혀를 차며 동정을 표했다. 아빌리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왕이 몰락하고 신권보다 금권이 강력한 힘을 휘두르기 시작한 시대, 빠르게 격변하는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아빌리가는 오랜 소원을 이루었다.
*
마흐무트는 병약한 아이었다. 조산에 원인 모를 허약함이 겹쳐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다. 위장도 약해 젖도, 이유식도 다른 아이보다 오래 먹어야 했고 초콜릿 따위가 들어간 자극적인 간식들은 의사의 허락 하에 정말 가끔만 먹을 수 있었다. 부유한 부모는 유일한 아들을 위해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선물했고 애정으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러나 마흐무트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알아보는 대신 홈스쿨링 교사를 알아봐야 했고, 공놀이 대신 정원 산책으로 만족해야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처지이니 머리맡에서 춤추는 죽음 역시 익숙하기만 했다.
느닷없는 찬공기가 마흐무트의 어린 뺨을 쓰다듬었다. 잠이 얕은 아이는 금방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이 열려있었다. 조금만 추워도 쉽게 잔병치레를 하는 아이 때문에 침실의 창문은 해가 진 뒤 만큼은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아이는 조그만 담요를 몸에 두르고 창가로 다가갔다. 밤공기에 휘말려 새카만 하늘을 향해 펄럭이는 커튼과 유리에 가로막히지 않은 달은 아이의 눈에는 너무나 생소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돌연 허공에 상이 맺히듯 나타난 남자는 장식용 발코니 난간에 올라섰다. 달을 등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새카맣게 흐렸지만 마흐무트는 남자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마흐무트를 향해 고풍스럽게 인사했다. 언젠가 부모님과 함께 보았던 고전 연극에서 나온 인사법이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주인님.”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마흐무트는 홀린 듯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잡았다.
*
너희들이 빼앗아 간 것을 돌려받겠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린 아들과 침실벽에 남은 피로 적힌 문장. 다행히 침실벽의 혈흔은 아들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부부는 안심할 수 없었다. 원한에 대한 복수거나 재산을 노린 납치범이라면 분명 차후에 연락이 올 것이다. 부부는 전문가까지 동원하며 납치범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납치범의 연락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
*
마흐무트를 보자마자 아빌리가는 그동안 자신이 ‘약간’ 성급했음을 인정했다. 주인은 그가 도움을 주기 전부터 이미 훌륭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인간의 태를 빌린 몸이 약했던 것은 그만큼 흡혈귀로서의 인자에 많이 침식당했다는 뜻이었다. 마흐무트는 인간인 동시에 흡혈귀였다. 아빌리가는 마흐무트에게서 죽은 주인의 향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빌리가는 어린 마흐무트를 그들의 성에 모셨다. 마흐무트는 성의 구석구석을 익숙하게 돌아다녔다. 아이의 곁에는 언제나 아빌리가가 있었다. 아빌리가는 동화책을 읽어주고, 잠자리를 돌봐주고, 식사를 챙겨주고, 손수 목욕을 시켜주며 극진히 마흐무트를 돌봤다. 흡혈귀로서 알아야 할 모든 것들 역시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었다. 흡혈귀로서의 힘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역시 아빌리가의 몫이었다.
그러나 어린 주인은 아빌리가가 만족할 만큼의 ‘힘’을 되찾지 못했다. 아빌리가는 초조해졌다. 주인은 아빌리가보다 약해도, 강해도 상관 없으나 최소한 무뢰한들을 물리칠 정도는 되어야 한다. 주인을 잃었을 때의 절망감이 수백년의 시간을 뚫고 되살아났다. 조급해진 아빌리가는 마흐무트를 몰아붙였으나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애초에 베이스가 된 인간의 육신이 연약한 탓이었다. 아빌리가는 열이 올라 끙끙 앓는 어린 주인의 손을 잡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수하가 주인보다 우수한 클랜이 없는 것도 아니다. 주인이 아빌리가보다 약하다면, 아빌리가가 주인을 지키면 된다. 아빌리가의 보호는 더욱 편집증적으로 발전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성 안에서, 마흐무트는 온전한 흡혈귀로 각성했다.
뿔뿔이 흩어져있던 클랜원들이 동시에 주인의 귀환을 깨달았다. 그것은 무의식 단위에 새겨진 본능의 힘이었다. 홀린 듯 옛 거처를 찾아간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아빌리가였다. 여유롭게 미소짓고 있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클랜원들을 한 곳으로 안내했다.
주인이 그곳에 있었다.
눈빛도, 머리카락의 빛깔도, 분위기도, 말씨도, 모든 것이 달랐으나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죽는 날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주인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눈물을 터뜨리는 자들도 있었다. 환희와 눈물이 뒤섞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서서히 진정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빌리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빌리가는 그가 오랫동안 원수의 집안을 지켜보다가 주인을 모셔오게 되었음을 서술했다. 침음을 삼키는 동료들 속에서 큐로스는 새로운 주인을 돌아보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그저 그 곳에 있다는걸 알고만 있어도 불안감이 누그러드는 것이 역시 주인이 맞았다. 그새 아빌리가는 주인의 곁으로 다가가 자잘한 시중을 들고 있었다. 큐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주인에 대한 아빌리가의 집착은 예사롭지 않았고, 아빌리가에 대한 주인의 의존도 역시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방랑을 즐기던 아빌리가는 사라지고 주인의 곁을 그림자처럼 맴도는 아빌리가만 남았다. 클랜원이라 할지라도 아빌리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주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그들 역시 아빌리가의 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는 상황이었다. 동시에 모두가 포기한 문제에 홀로 매달려 기어코 주인을 되찾은 것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태를 빌려 되태어난 주인은 아빌리가가 아니었더라면 침식을 견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죽었거나 인간의 손에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큐로스는 클랜원들 중 가장 빠삭하게 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소아성애자.”
“시끄럽군요.”
“페도필리아.”
“.......”
큐로스는 낄낄 웃으며 아빌리가가 부탁했던 상자를 넘겼다. 아빌리가는 못들은 척 웃으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부탁했던대로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술레이만이 하는걸 설마 네가 그대로 따라할 줄은 몰랐지.”
아빌리가의 미소에 금이 갔다. 큐로스는 아예 배를 잡고 뒹굴었다. 탁 소리가 나도록 상자를 닫은 아빌리가는 창문을 열고 정원을 향해 큐로스를 내던졌다. 햇살이 쨍쨍한 정원 위로 으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울렸지만 아빌리가는 큐로스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주인의 귀환을 기다린 동안 큐로스는 훌륭한 데이워커가 되어있었다. 다만 큐로스의 고함에 주인이 단잠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약간 걱정이었다. 아빌리가는 창문을 꼭꼭 잠그고 마흐무트가 잠들어있는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