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무스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다가 임무가 있는 당일아침에서야 소식을 알려준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다이무스의 잘못이었다. 꺼낼 말을 찾지 못해 허둥대다가 풀이 죽어 네, 하고 대답하던 토마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다이무스는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주의를 돌렸다.
인형실 끊기 작전에 참가한 인원은 다섯이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고, 익숙하지 않은 얼굴도 있었다. 불안하게 동요하던 마음이 익숙한 긴장감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깨닫고 벽에 기대서있던 자세를 바로했다. 그는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더니 곱게 접힌 손수건 하나를 내밀었다.
“지난번에 토마스에게 빌렸던 손수건입니다.”
익숙한 손수건에서 낯선 향기가 났다. 루이스는 고맙게 썼다고 전해달라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다이무스는 손수건을 내려보다가 꾹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다이무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릭 톰슨이 임무의 시작을 알렸다.
*
릭 톰슨의 능력을 빌려 도착한 루사노 수도원은 예상외로 한적했다. 작전을 들켜 기습을 당하는 것인가 우려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습격을 시도하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진의 심장부이니만큼 인파에 둘러싸여 난전을 벌일 것 마저 예상했던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마주치는 눈동자에서 자신의 것과 같은 의문만을 읽어낼 뿐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목적지로 이동했다.
걸림돌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임무는 내부분열로 실패했다. 노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다이무스의 신발에 닿았다. 신발에 닿은 핏물은 표면에 살얼음이 끼더니 엷은 파열음을 내며 얼어붙었다. 시바가 액자를 들고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다이무스는 재스퍼의 말없는 재촉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마음으로 귀가한 다이무스를 맞이한 것은 기대하던 얼굴이 아닌 낯선 인물이었다. 카인 스타이거. 비능력자의 몸으로 이글과 대등하게 맞서 싸운 남자는 완전무장을 한 채로 다이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보디가드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린 적이 있나.”
통성명을 건너뛰고 용건 먼저 말하는 태도는 무례함을 핑계로 그를 쫓아내기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다이무스는 두 어깨 가득 피로를 짊어지고도 카인에게 축객령을 내릴 수 없었다. 토마스가 집에 없고, 카인이 토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이무스에게 부정의 대답을 얻은 카인은 더욱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이무스는 지체없이 자신을 따라온 쾌검사들을 불러모아 디미스트로 향했다. 카인도 함께였다.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너울거리는 안개 아래 앙금처럼 누워있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토마스는 그 가운데 허술하게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흰 피부에 들러붙은 피딱지가 선명했다.
“토마스 스티븐슨!!”
다이무스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마네킹처럼 축 늘어져있던 몸뚱이가 움찔하더니 비틀비틀 고개를 들었다.
“……다이무스씨?”
다이무스는 한달음에 달려가 토마스를 부축했다. 뼈대가 덜 여문 몸뚱이는 가뿐했다. 다이무스의 부축에 맞춰 바닥을 디뎠던 토마스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허물어졌다.
“발목을 삐었나봐요.”
토마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다이무스는 좀처럼 똑바로 서지 못하는 토마스를 그대로 안아들었다. 온몸이 생채기 투성이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으니 옮기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임무는 잘 다녀오셨어요? 다친데는 없구요?”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토마스는 씩 웃었다. 엉망진창으로 다친데다가 발목까지 삔 사람이 지을 표정이 아니었다.
다이무스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안개속에 쓰러져있던 자들은 모두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이 분명했다. 그들이 오늘 상대할 예정이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포트레너드에 침입을 시도했고, 토마스 홀로 그들에게 맞서 싸운 것이다.
루사노가 텅 비어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무표정으로 굳어있던 다이무스의 얼굴에 볼주름이 깊게 패였다. 지나치게 이를 악 문 탓이었다.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의사-다이무스의 부상을 대비해 불러놓은 사람이었다.-에게 토마스를 넘기고, 다이무스는 문 밖에서 치료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쓰러져있던 강화인간들 사이를 정신없이 헤메고 다녔던 카인은 조금 늦게 다이무스의 저택에 도착해 단 한마디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모두들 살아있었소. 다들 그저 기절해있던 것 뿐이오.
토마스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때문에 더욱 심하게 다친 것이 분명했다.
다이무스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토마스를 헬리오스에 가입시키지 않은 것이 새삼 다행이었다. 이곳에서 토마스의 보호자는 오직 다이무스 홀든 단 한명 뿐이다. 보디가드로서 토마스를 고용했다는 사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
치료를 받는 사이 까무룩 잠들었던 토마스는 가위에 눌려 깨어났다. 부목이 대어진 발로 바닥을 굴렀다가 으악! 하며 자지러진 것은 물론이었다.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이무스는 토마스에게 편하게 쉴 것을 명령했지만 토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피웠다. 다이무스를 노리는 위험이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적지 않게 불안했던 것이다. 다이무스는 고민 끝에 주변을 모두 물리고 토마스가 처치한 강화인간들이 안타리우스의 전력 거의 대부분이었으며 다이무스가 수행한 임무가 바로 그들의 수장을 제거하는 일이었음을, 그러므로 토마스가 더 이상 크게 걱정 할 필요가 없음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토마스는 좀처럼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액자를 가지고 가버렸다면서요.”
다이무스는 말문이 막혔다. 토마스의 지적이 사실이었다. 시바 포. 예측할 수 없는 그 여자가 훔쳐간 액자를 가지고 무슨 일을 벌일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액자를 가지고 놀다가 순순히 연합 혹은 헬리오스에 버리고 갈수도 있고, 그대로 안타리우스의 잔당들에게 돌려줄 수도 있다. 머리를 굴려 변명거리를 고민하던 다이무스는 토마스의 시선에서 자신이 변명 할 타이밍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토마스는 이미 밀착경호를 할 생각이 만만이었다.
다이무스는 한밤중까지 경호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토마스를 밤새워 세워두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첨예한 대립각을 이루던 둘의 갈등은 반쯤 자포자기한 다이무스의 제안 아래 극적인 타결을 이루어냈다.
다이무스는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삼켰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직 붕대도 부목도 떼어내지도 않았건만 토마스는 다이무스의 곁에 누워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었다. 어느새 또 이불을 차낸건지. 다이무스는 잠시 몸을 일으켜 발치에 구깃구깃 구겨져있는 토마스 몫의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토마스는 잠시 뒤척이는가 싶더니 다시금 얌전해졌다.
누군가와 건전하게 한 침대를 쓰는 것이 몇십년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기억이 맞다면 철이 든 이후로는 처음 겪는 일이 분명했다.
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다이무스는 늦게나마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잠은 순식간에 다이무스를 집어삼켰다. 꿈 한 조각 기억나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