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토마] 그가 내게로 왔다
+ 너구리 수인에 쇼타 마틴 x 인간 토마스 설정
+ 육아물에서 역키잡까지 으하하하
+ 마틴토마 외에도 하랑토마, 티엔토마, 쌍충토마 등의 냄새가 살짝 납니다 뿅!
자고로 다음 학기의 등록금이란 절대다수 대학생들의 고민거리인 법. 토마스 스티븐슨 역시 등록금과 용돈으로 인한 자금 부족을 절감하며 아르바이트 공고 사이트를 헤맸다. 그러나 고작 3개월 가량의 시간 안에 장학금을 제외한 금액의 등록금을 해결하고 지갑과 통장을 살찌울 적절한 아르바이트는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사실 괜찮은 아르바이트만 구할 수 있다면 휴학 역시 충분히 고려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때 코묻은 돈까지 부어가며 채워놓았던 대학 학자금도 예상밖의 사태에 앞날이 어두운 판이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다 그런 법. 시급이 세다면 어김없이 택배 상하차나 단순노무 등 3개월간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있는 아르바이트들이었고, 괜찮겠다 싶은 아르바이트들은 하나같이 최저시급에 간당간당하게 발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고보니 아르바이트에 도가 튼 친구의 말로는 이러한 아르바이트 공고 사이트에 구인광고를 올릴 때는 최저시급 미만의 금액을 기입할 시 아예 게시글 등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시급에 거짓말을 하는 곳도 적지 않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다. 무성의하게 스크롤 휠을 굴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어라?”
토마스는 잘못봤나 싶어 스크롤을 위로 올리고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이돌보미 아르바이트 구인글이 올라와 있었다. 베이비시터나 가정부같은 일은 아르바이트가 아니고 업체측에서 고용자와 고용인을 연결시켜주는 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토마스는 희미한 상식을 더듬어보며 게시글 제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이돌보미 아르바이트이면서도 성별 표기가 남녀 공통으로 되어있는 것도 특이했지만 무엇보다 토마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다른 아르바이트들과는 자릿수부터가 다른 급여 항목이었다. 이쯤이면 거의 취직한 직장인 수준의 월급이 아닐까? 토마스는 게시글 제목을 클릭했다. 조건은 더더욱 파격적이었다. 성별 불문, 나이 제한 없음! 정중하며 간략하게 서술된 조건사항은 꾸밈없이 담백했기에 더욱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좋았다. 이거 새우잡이나 장기밀매 아냐? 토마스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조건이 좋기만 한 아르바이트는 피해다녀야 한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좀처럼 백스페이스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토마스는 아이를 좋아했고, 사촌동생 몇 쯤은 동시에 돌본 경험도 있다. 혹시나 싶어 첨부된 이력서의 양식을 열어보자 개인정보를 기입하는 란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토마스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력서의 빈칸을 채워 기입된 메일 주소로 보냈다.
3일 뒤, 친구들과 단골 식당에서 식사중이던 토마스는 면접 알림 문자를 받고 난 뒤에야 자신이 베이비 시터 아르바이트에 지원을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같은 식탁에 앉아있던 친구들은 토마스의 설명을 듣더니 하나같이 미심쩍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 있었다던 수면제 탄산음료 사건을 언급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토마스가 언급한 급여 액수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손 빠른 친구가 토마스가 받은 문자에 첨부된 주소를 구글링 해 찾아낸 으리으리한 집의 이미지까지 나오자 어쩌면 정말 토마스가 연금복권 급의 행운에 당첨될 기회를 얻은걸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흘러나왔다. 주소는 수도권 한복판의 부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가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으며 다른 곳보다 치안 또한 확실하게 유지되고 있을테니 한번 쯤 다녀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토마스의 마음이 서서히 흔들렸다. 문자는 언제쯤 시간이 괜찮은지 묻고있었다. 토마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
토마스는 심각하게 육아서적을 정독했다. 정말 채용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거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토마스가 앉아있는 소파는 최고급 수제 소파 답게 면학에도 지장 없는 완벽한 안락함을 제공하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토마스조차 만족시키는 최고의 차가 준비되어 모락모락 김을 올리고 있었다. 책장이 다섯장 정도 넘어갔을 무렵, 토마스는 문득 장난감 블록 부딪치는 소리가 멎었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갈색 눈동자가 황급히 내리깔렸다. 덩달아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에 돋아난 다갈색의 동물 귀 역시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같이 놀아달라는건가?’
토마스는 쳐다보지 않은 척 그를 외면하며 장난감 블록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아이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뭐, 놀아주는 것 정도야. 토마스는 웃으며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제스쳐의 의미는 명확했다. 아이는 활짝 함박웃음을 짓더니 장난감 블록을 놓고 가장 좋아하는 동화책을 들고 토마스에게 다가왔다. 토마스는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들어올려 무릎에 앉혀주었다. 아이는 아직 작았다. 토마스가 아이를 품에 안고 고개를 숙여야 아이의 정수리에 턱이 닿을 만큼. 사람으로 치면 다섯 살이라고 했었지? 토마스는 아이가 가져온 동화책을 펼치며 생각했다. 금발이 턱을 간질이며 달큰한 젖내가 폴폴 올라왔다. 특이한 아이라고는 하지만 이럴 때 보면 여느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아무리 충격적인 뉴스도 일주일이면 일상이 된다던가. 토마스는 면접날에 알게 된 세상의 이면에 대해 빠르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
면접 당일, 토마스는 으리으리한 저택의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토마스는 확신했다. 논픽션은 픽션을 뛰어넘는다. 드라마에서 나오는‘재벌의 집’은 현실의 그것에 비하자면 감히 비교하기도 민망한 싸구려 모조품에 불과했다. 토마스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님접대용으로 내어진 찻잔을 들고 찻물로 목을 축였다. 그윽한 향이 입안 가득 맴돌았다. 토마스는 어느새 긴장감을 잊고 한모금 한모금 차를 마셨다.
“차가 마음에 드시나봅니다.”
토마스를 일깨운 것은 호의 어린 낯선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 여성은 토마스를 보며 웃고 있었다. 토마스는 약간의 부끄러움과 함께 찻잔을 내려놓았다. 깊고 오묘하다는 차茶의 세계를 약간이나마 훔쳐본 기분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그러니까, 향이 좋은 차는 처음이라서요.”
차 덕분에 어느정도 긴장이 풀린건지 토마스는 쑥스럽게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중년 여성은 한 차례 웃어보이더니 토마스의 이력서를 들며 본론을 꺼냈다. 토마스는 본격적으로 어린아이를 돌보아 본 경험은 없었다. 이력서에도 솔직하게 적혀있는 만큼 중년 여성 역시 그 점을 가장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아. 떨어졌구나.
토마스는 담담하게 생각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베이비시터를 구하는데 애를 돌본 경험이 없다면 당연히 곤란할터다. 게다가 이런 부잣집 아이라면 베테랑 베이비 시터도 차고 넘치도록 구할 수 있겠는데 뭐가 아쉬워 토마스를 붙잡는단말인가. 토마스는 그저 신기한 경험을 한 셈 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상황은 토마스의 예상을 벗어나는 쪽으로 구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를 싫어하진 않으신다구요?”
“네.”
“그렇다면, 동물은 어떤가요?”
“네? 동물……이요?”
이 집에서 동물도 키우나? 그렇지만 토마스는 이 집의 마당에서 개를 보지도 못했고 거실에서 고양이 장난감을 보지도 못했다. 동물 냄새는커녕 애완동물 털 하나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동물에 대해서 묻는 이유가 뭘까. 토마스는 햄스터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개는 지금도 한 마리 키우고 있고 고양이는 어렸을 때 두 마리 키워봐서 익숙합니다. 그렇지만 햄스터나 기니피그같은건 키워본 적이 없어서…….”
“동물을 싫어하진 않는가보군요.”
“익숙하고, 또 귀여우니까요.”
“그렇다면 너구리라면?”
“……라쿤 말씀이세요?”
당황한 토마스에 비해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베이비시터 알바가 아니라 펫시터 알바였나? 그렇지만 너구리는 키워본 적 없는데? 아니 그보다 이 나라 안에서 너구리를 키워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토마스의 머릿속이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지는 사이 고용주는 손짓 한 번으로 고용인을 부르더니 짧은 신호를 보냈다.
“라쿤……은 몇 번 본게 전부인데…….”
토마스가 힘겹게 말을 잇는 도중 노크 두 번과 함께 문이 열렸다. 정중한 인상의 고용인의 품에는 조그만 새끼 너구리가 하나 안겨있었다. 진짜 펫시터였나? 그런데 왜 애를 키워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거지? 토마스가 눈을 꿈뻑거리는 사이 고용인은 그의 고용주에게 새끼 너구리를 넘겨주었다. 고용인의 품에서 얼어붙어있던 새끼 너구리는 그녀의 품을 파고들 듯 안겨 눈만 빼꼼 내밀어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너구리의 눈동자는 갈색이었다. 너구리 눈동자가 갈색이던가? 그러나 새끼너구리는 금새 얼굴을 숨기고 웅크렸다.
“제 아들입니다.”
네?
예상을 뛰어넘는 말에 토마스의 눈이 커졌다. 그런건가? 애완동물을 자식처럼 키우는 사람들? 두뇌 중 논리를 담당하는 부분이 힘겹게 합리화를 시도했다.
“관용어구를 빌리자면, 배 아파 낳은 제 아이지요.”
마음으로 낳은 아이가 아니구요? 토마스의 논리는 단번에 박살났다. 게다가 중년 여성의 얼굴에는 어느새 주름살이 사라지고 머리 위에는 한 쌍의 뾰족한 너구리 귀가 돋아나 있었다. 토마스의 발밑을 단단히 받치고 있던 현실이 무너지고 있었다.
수인獸人. 그들은 동물의 형태와 인간의 형태를 모두 취할 수 있으며 기나긴 수명과 함께 특수한 힘을 지닌다. 그들은 지구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들의 사이에 섞여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들의 생태는 인간과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다행히도 자금과 권력으로 감출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가진 힘은 인간사회를 물밑에서 다룰수 있을 유용한 종류였다. 그들은 쉽사리 인간들과 동화되었으며, 그들만의 커넥션으로 더욱 탄탄한 기반을 확보했다. 이미 그들은 인간 사회에 흐르는 특수한 혈통(blue blood)이었다.
“이 아이는 우리들 부모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몰라요. 우리 아이를 돌봐주실 수 있겠어요?”
토마스는 그녀의 품에 안긴 너구리를 바라보았다. 어떠한 충동에 등떠밀려,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기간은 6개월이 되었다. 한 학기쯤 휴학하는 것은 한번 쯤 생각 해 두었던 일이라 큰 거부감은 없었다. 수인 부부의 도움으로 토마스는 그들이 경영하는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한 것이 되었고 24시간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일이므로 위장용 주거지는 사원들을 위한 아파트로 등록되었다. 아이의 옷을 세탁한다거나 하는 일은 신경쓰지 마세요. 당신이 할 일은 우리 아이를 돌봐주는 것 뿐입니다. 그러는데 필요한 다른 일들은 다른 고용인들을 불러 부탁하세요. 인간인 당신이 모든 일들을 혼자서 다 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베이비시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토마스로서는 그냥 아이 옷을 세탁하거나 할 필요는 없겠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감사한 제안일 따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힘은 때로는 신의 힘에 필적한다. 다음날 휴학신청 확인서를 들고 돌아온 토마스에게 부부가 내민 위장용 계약서와 사원증, 그리고 사원 아파트의 주소와 주문제작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는 사이즈의 정장(필요할 때 입을 수 있는 용도였다)은 무교인 토마스에게 자본주의의 화신이 남긴 흔적 비슷한 것으로 느껴졌다.
토마스는 그들 부부의 집으로 가서 지낼 예정이었다. 6개월간 집을 떠나야 하는 일이니 주변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한 법. 갑작스럽게 토마스에게 주어진 기회에 대해 놀라지 않은 주변인이 없었다. 부모님은 외동아들이 가져온 계약서와 의욕을 보시곤 너도 이제 성인이라며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토마스의 친구들이었다. 채용 공고도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기회를 잡았냐는 그들의 질문에 토마스는 지난번 특이한 아르바이트 면접을 가던 중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토마스는 짐을 꾸려야한다며 먼저 술자리에서 벗어났다. 덩그러니 남겨진 그의 친구들은 토마스가 남긴 단서들을 토대로 반쯤 술에 절은 머리를 맞대 인턴계의 전설이 될만한 도시 전설을 하나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모든 소란을 뒤로 하고, 토마스는 그들이 보낸 차에 올라탔다. 이성의 어딘가가 마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의심 한 조각 할 수 없었다. 다만 토마스는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마치 저항할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맏긴 것 처럼
*
아이의 이름은 마틴 챌피였다.
거진 사람의 모습을 한 채 기다리고 있던 아이를, 토마스는 바로 알아보았다. 연한 갈색 눈동자. 눈동자에 담긴 감정. 토마스는 한 걸음 거리에서 멈춰섰다. 샛노란 금발이 햇살 아래서 말갛게 반짝였다. 아이의 머리 위에는 한 쌍의 너구리 귀가 돋아나 있었고 엉덩이 뒤에는 통통한 너구리 꼬리가 빳빳하게 경직되어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아직 그들의 아이가 어려 변신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했었다. 걱정어린 기색으로 말하던 부부와 달리 토마스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대여섯살 짜리 어린이들은 으레 발음도 어설프고 걷는 것도 미숙해 자주 넘어지기 마련이다.
마틴은 불안한 듯 꼼지락거리며 귀와 꼬리를 자꾸만 감추고 눈치를 살폈다. 토마스는 캐리어를놓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아이의 금발을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대단해. 잘했어!”
긴장으로 굳어있던 통통한 뺨이 풀어졌다. 아이는 토마스를 향해 주저하며 팔을 벌렸다. 토마스는 마틴을 안아주었다. 문득 아이 돌보는 일이 예상보다 쉬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는 감히 아이 돌보기가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침 나절의 토마스를 매우 때려주고싶어졌다.
마틴 챌피는 예민한 아이였다. 잘 노는 것 같아도 낯선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꾸만 눈치를 살핀다. 아이를 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조심스럽게 대해야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식사도, 간식도, 낮잠도, 놀이시간도 어찌어찌 해냈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건은 밤에 터졌다. 토마스의 침대는 마틴의 침실에 함께 있었다. 기숙사 룸메이트나 다름없는 침대배치였지만 이것은 고용인 부부가 그토록 간곡하게 토마스에게 부탁했던 사항이었다. 밤에 혼자 잠들기 무서워하는 아이들은 종종 있다. 게다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알아차리기 가장 좋은 위치겠거니 싶어 토마스는 흔쾌히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익숙하지 않은 일들에 시달리고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에서 얕게 잠들었던 토마스는 훌쩍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마틴……?”
“끅!”
잠기운이 채 가시지 못한 목소리에 아이는 기겁하고 숨을 삼켰다. 토마스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토마스는 서둘러 안경을 찾고 마틴의 침대로 다가갔다. 무드등이 켜졌다. 어린 마틴의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있었고……아이의 잠옷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토마스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하자 아이의 떨림이 한층 심해졌다. 갑자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한 줄 알았던 토마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틴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잠옷이 젖는 것 보다 빨리 아이를 안심시켜주는 것이 중요했다.
“축축해서 기분나빴지? 씻고 형아 침대에서 같이 자자.”
품안에서 뻣뻣하게 굳어있던 조그만 몸이 조금씩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토마스는 마틴의 정수리에 입맞추곤 다른 고용인을 불러 침대와 마틴의 옷을 맡기곤 딸려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마틴이 얌전했으므로 씻기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남자아이여서 그런지 더더욱 동생을 돌보는 기분이었다. 고용인은 마틴의 잠옷과 더불어 토마스의 새 잠옷까지 함께 가져왔다. 눈치가 엄청 빠르신가봐. 토마스는 내심 감탄하며 마틴과 함께 옷을 갈아입었다. 새 잠옷은 서로의 잠옷에서 사이즈만 바꾼 것처럼 무늬도 디자인도 동일했다.
“이제 가족이라서 같은 잠옷을 입으라는건가봐.”
토마스는 웃으며 마틴의 잠옷 단추를 채워주고 함께 침대에 누웠다. 토마스는 마틴을 바라보듯 옆으로 누웠다. 바로 누워있던 아이는 고개를 들어 몇 번 토마스를 올려보다가 곤히 잠들었다. 그것이 곁에 누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것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짠했다. 몰려오는 졸음과 싸우던 토마스는 마틴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뒤에야 마음 놓고 잠들었다.
마틴은 새벽녘에 한 번 더 깨어났다. 아이의 곁에는 오늘부터 아이의 곁을 지키기로 한 사람이 잠들어있었다. 마틴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심조심 몸을 움직여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따스하고 포근했다. 남자의 잠옷무늬는 마틴의 것과 똑같았다. 이제부터 가족이라는 남자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마틴은 남자의 잠옷무늬에 자신의 잠옷 소매 무늬를 맞춰보며 몇 번 하품을 깨물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이 뒤로 마틴은 울다가 토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말하기 싫어서 너구리 상태로 토마스 품만 고집해서 자기도 하고, 잠투정도 부리는 바람에 토마스가 안고 밤산책도 다니고 자장가도 불러주고 토닥토닥도 하고.......
여하튼 토마스 덕분에 마틴이 많이 안정됐음 좋겠다 나중에 가서는 자다가 중간에 깨서 우는 일도 사라지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틴이 토마스랑 같이 자는거 아니면 낮잠을 꼭 토마스 무릎 위에서 자고싶어하는데 인간형일때 무게는 무릎베개 외에는 감당이 안되어서 마틴이 너구리 상태로 자지만 그나마도 시간이 지나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워졌음 좋겠다 ㅎ 쑥쑥 커라 마틴!
마틴의 키가 조금 더 컸다. 토마스는 마틴의 부모님께 신이 나서 마틴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부는 유치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치원이요?
마틴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의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유치원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마틴 또래의 아이들이 노란 원복을 입는 것 같기는 했다. 다음날 점심, 마틴과 토마스는 전화를 통해 일주일 뒤부터 마틴이 유치원에 가게 되었음을 전해들었다.
*
마틴이 울었다. 깜짝 놀라서. 밥 먹기가 싫어서. 세수하기 싫어서. 아이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너무 우는 바람에 그날 밤 경기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유치원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틴의 불안증은 토마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장난감 놀이에 어울려 주어도 반응이 없었고 낮잠을 자다가도 가위에 눌린건지 악몽을 꾸는지 끙끙 앓다가 창백하게 핏기가 가셔서 깨어나기도 했다. 피가 마르는 것은 토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치원에 가기 싫어?”
토마스는 체한 후유증이 덜 가셔 침대에 누워있는 마틴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초점이 흐릿하던 갈색 눈동자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가기 싫어. 무서워. 토마스는 정신없이 우는 마틴을 안고 방 안을 한참 맴돌며 다독였다. 울음이 어느정도 잦아들자 눈물을 닦아주고 조금씩 물을 먹였다. 토마스는 많이 지친 마틴을 무릎에 앉히고 침대 맡에 기댄 채로 다독였다.
“마틴은 유치원이 왜 무서워?”
“형아 없어……. 가기 싫어…….”
“유치원에는 형아보다 더 좋은 친구들이 많을거야.”
“그래두…….”
“유치원 갈 때, 형아랑 같이 가자. 올때도 꼭 형아가 갈게. 같이 오는거야. 오는 길에는 사탕이나 아이스크림도 하나 먹자. 형아는 마틴이랑 같이 나눠먹을때가 제일 맛있더라. 마틴은?”
마틴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하긴 난생 처음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데 얼마나 무섭겠는가. 토마스는 뽀얀 이마에 몇 번이나 뽀뽀를 해주며 마틴을 달랬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거야. 토마스의 다독임은 규칙적이었다. 며칠을 불안에 떨었다. 마음이 놓이자 그동안 지친 만큼 무거운 졸음이 밀려들었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천천히 내리깔렸다.
“으응…….”
토마스는 어느새 잠든 마틴을 침대에 잘 눕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부디 내일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
토마스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늘 아침, 마틴은 하마터면 첫날부터 유치원에 지각할 뻔 했다. 그것도 모자라 불안해서 어쩔줄 몰라 하는 아이를 업어서 유치원까지 데려왔던 토마스는 자신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목덜미에 매달린 채 자지러지게 우는 마틴이 진정할 때 까지 안고 달래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유치원 선생님 한 분도 덩달아서 마틴에게 달라붙어 있었고…….
‘형아가 꼭 데리러 올게. 약속!’
손가락을 걸고 단단히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토마스는 유치원이 끝나기 20분 전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다리를 재촉했다. 마틴에 대한 걱정 역시 하루종일 토마스를 괴롭혔음은 물론이었다.
다행히도 토마스는 마틴의 유치원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치원의 보조선생님이 토마스를 알아보고 보호자 대기실로 안내했다.
‘요즘 유치원들은 보호자 대기실도 있구나…….’
아니, 이 유치원만 있는건가? 토마스는 아직 썰렁하니 아무도 없는 보호자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생활감이 남아있는 대기실에는 푹신한 방석이 덧대진 의자들이 가득했다. 토마스는 문과 제법 가까운 위치의 의자에 앉아 마틴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틴일까?
“어?”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났던 토마스가 목격한 것은 까만 머리카락을 쫑쫑 땋은 낯선 사내아이였다.
“형아는 누구에요?”
“마틴네 형아에요-.”
아이는 각각 색이 다른 두 눈동자로 토마스를 빤히 바라보더니 냅다 다가와 토마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틴일까?
“?”
하랑을 바로 옆자리 의자에 앉히고 손장난에 어울려주던 토마스는 이번에야말로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마틴네 형아에요.”
그러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역시 새카만 머리카락에 오른팔과 왼팔이 각각 희고 검은 얼룩이 번져 있는 사내아이였다. 아이는 차분한 눈으로 토마스를 응시하다가 타박타박 걸어왔다.
*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번에야말로 마틴일까?
“?”
“헤에…….”
티엔과 투닥거리는 하랑을 간신히 말리고 각각 자신의 좌우에 앉힌 토마스는 보송보송 흰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사내아이와 갈색 짧은 머리카락 위로 뾰족한 귀가 솟은 사내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입을 연 것은 곱슬머리 아이였다.
“형은 누구야?”
“마틴네 형아야.”
아이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
토마스의 다리 사이에는 까미유가, 발치에는 히카르도라는 아이가 앉아 그의 무릎에 볼을 대고 있었다. 오른무릎과 왼무릎은 각각 하랑이라는 아이와 티엔이라는 아이에게 점령당해 슬슬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언제쯤 마틴이 오는걸까.
그 사이에 많은 보호자가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저 문을 나섰다. 토마스는 유치원 선생님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되새기며 마틴이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엉아-!!”
마틴이었다. 아이는 달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그러다가 토마스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당장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게 아닌가. 토마스는 허둥지둥 아이들을 내려놓고 마틴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붙잡는 손은 한 두개가 아니었다. 하랑은 볼이 퉁퉁 부어서, 히카르도는 싫은 눈치로, 까미유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으면서, 티엔은 안그런척 슬쩍 토마스의 옷자락을 잡고 버텼다. 이걸 뿌리쳐야하나? 토마스가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사이 마틴이 힘껏 달려와 토마스의 품에 안겼다.
“내 형아야아-!!”
토마스는 빼액 울음을 터뜨린 마틴을 달래느라 진을 빼야했다.
*
첫날 집에 돌아온 마틴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토마스는 자기만의 형아라며 열변을 토했다. 토마스 스스로도 당연히 나는 마틴의 형아이며 다른 아이들의 형아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했음은 당연했다.
그 뒤로 유치원이 끝나자마자 냅다 보호자 대기실로 달려오기는 하지만, 마틴은 점점 유치원 생활에 적응하는 눈치였다. 귀가길은 마틴이 가장 많은 말을 하는 시간이었다. 마틴의 조그만 손을 잡고 오늘은 어느 친구와 놀았고, 어떤 간식이 맛있었고 어떤 칭찬을 들었는지 종알종알 말하는 것을 듣고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어느날, 마틴이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날이 있었다. 언짢은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판단한 토마스는 돌아오는 길에 나눠먹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똑 잘랐다. 아이스크림 절반은 어린아이가 다 먹어도 괜찮다. 토마스에게서 초코아이스크림을 받은 마틴은 묵묵히 아이스크림을 녹여먹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마틴의 입주위는 아이스크림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토마스는 손수건을 적셔 입가를 닦아주곤 이제 더 잘생겨졌다며 이마에 요란하게 뽀뽀까지 해 주었다.
“그런데 뭐가 우리 마틴을 기분나쁘게 했을까?”
언뜻 풀어졌던 아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분한 듯 찡그린 눈동자에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마틴은 어린 아이 나름대로 조리있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북받치는 감정을 이겨내는 것은 어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토마스에게 주어진 단서는 마틴이 엉엉 울며 토해낸 단어들과 울며 가방을 뒤져서 꺼낸 구깃구깃한 종이뭉치였다. 오늘 유치원에서 종이접기 시간이 있었는데, 유치원 친구(마틴은 친구라는 단어에도 진저리를 쳤다)가 마틴이 종이접기를 잘 못한다며 놀린 모양이었다.
“그럼 형아랑 같이 종이접기 놀이 할래?”
“엉아랑?”
“그럼! 형이 종이접기를 얼마나 잘 하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민하던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는 그런 마틴의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준 뒤 집에 있는 종이 몇장을 잘라 큰 정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었다. 종이접기는 학접기처럼 어린아이가 따라하기 어려운 것도 많지만 간단한 것들도 많다. 토마스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모서리를 제대로 접지 않아도 괜찮을 종이접기를 몇 개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마틴은 모서리를 꼭꼭 맞춰 접어내며 토마스를 놀라게 했다. 너구리 수인들은 손재주가 좋다더니 사실인가봐. 토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온 힘을 다해 마틴을 칭찬했다.
“정말 열심히 접었구나!”
마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종이접기는 슬슬 수업에서 놀이 단계로 넘어갔다. 어린아이의 집중력은 그리 대단치 못하다. 토마스는 마틴이 흥미를 잃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채곤 온갖 장난감들을 접어내 마틴과 놀기 시작했다. 아이는 금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종이 모형이 팡, 펼쳐지는 모습을 보며 몇 번이나 다시 접어달라고 하기도 하고 종이배를 대야에 띄우며 웃기도 했다.
그날 밤 마틴은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품에 안긴 마틴을 다독이던 토마스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결좋은 금발을 천천히 쓸어넘겨주었다. 좋은 꿈 꾸렴. 토마스는 젖살로 통통한 아이의 뺨에 입맞췄다.
*
수인이라는 존재는 아무래도 토마스의 입장에서는 신기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자제력이 약한 어린 수인들이 흥분하거나 이성을 잃을 때 튀어나오는 귀나 뿔, 꼬리 등을 목격할 때는 더더욱. 토마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아이는 다름아닌 티엔 정이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한 성격인 것 같았지만 아직 아이는 아이인지, 토마스는 티엔의 머리 위에 솟아난 한 쌍의 뿔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티엔의 뿔은 끝이 둥근 나뭇가지 형태였고, 모양만큼은 순록이나 사슴을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 색은 연한 푸른빛이었다. 파란 동물이 있던가? 토마스의 의문은 유치원 교사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용龍. 동양에서 구전과 설화 속에나 존재하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한다. 상상 속의 동물이 실존한다는 충격은 생각보다 금새 적응되었다. 무엇보다 토마스가 처해있는 상황이 상식의 기준에서는 페어리테일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무엇보다 티엔은 자주 토마스에게 접근했다. 장난을 치지도,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듯 먼저 관심을 드러내는 아이에게 거리감을 느끼기에는 토마스의 성품이 다소 무른 감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토마스는 티엔이 때때로 멀찍이서 자신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다가도 시선이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게 쓱,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기까지 하는 것이 하고싶은 말이 있는 티가 물씬 풍겼다.
그 무렵 티엔은 부쩍 자라나기 시작했다. 비유가 아닌 담백한 사실증언으로, 티엔은 그날 저녁 쯤에는 손가락 한마디 만큼은 더 자라있었다. 어마어마한 성장속도에 맞춰 티엔은 서둘러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에 입학했다. 이로써 토마스와 마틴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아마도 마틴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쯤- 티엔을 만날 수 있게 되리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예상은 빗나갔다.
마틴이 유치원에 간 사이, 티엔이 토마스를 찾아왔다. 수인들 사이의 네트워크는 서로의 가정사까지 내밀하게 아는 시골마을과 비슷한 것이었으므로 티엔이 토마스와 마틴의 집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문앞에 서 있는 티엔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허리춤에 간신히 닿던 아이가 이제는 토마스의 명치께는 훌쩍 넘을 만큼 자라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티엔의 시선이 내리깔렸다. 그 행동에서 약간의 실망감을 느낀 토마스는 뒤늦게 손님접대를 떠올렸다. 그러나 집안에는 마틴이 좋아하는-그리고 어린아이의 입맛에 맞는-달고 순한 간식들이 전부였다. 토마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티엔의 손을 잡고 눈여겨두었던 카페로 데려갔다. 토마스의 앞에는 커피, 티엔의 앞에는 고운 빛깔의 찻물이 담긴 찻잔이 올라왔다. 한 달만에 즐기는 커피향이었지만 토마스는 티엔에게서 주의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만큼 티엔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티엔은 찻잔이 거의 식어버릴 때 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는 토마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눈동자는 토마스가 알지 못할 깊이로 짙었다.
“……실례했습니다.”
티엔은,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토마스가 티엔의 손목을 잡았다.
“나중에라도,”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티엔이 어려운 말을 품고 있음을 느꼈고, 그토록 오랫동안 고민했음에도 차마 그토록 무거운 말을 털어놓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나중에라도 말 하고 싶다면 또 만나러 와도 괜찮아.”
토마스는 어른이었다. 성인이 된지 몇 년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며칠전까지만 해도 유치원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보다는 충분히 어른이다. 토마스는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 손이 미끄러져 티엔의 손을 잡았다. 토마스는 그대로 티엔의 손을 꽉 잡은 뒤 놓아주었다.
티엔은 보일 듯 말 듯 흐린 미소를 짓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났다.
토마스는 그대로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마음이 싱숭생숭 어지러웠다. 다 식은 커피를 바라보며 걱정의 갈피를 가다듬으려고 애쓰던 토마스는 뒤늦게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아차……!”
슬슬 유치원이 끝날 시간이다. 지금 당장 달려가더라도 최소한 5분은 지각이다. 마틴은 자전거를 싫어하니 자전거를 가져가는 것도 무리. 토마스는 횡단보도의 빨간 불이 켜진 사이에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5분 정도 늦을 것 같으니 마틴에게 알려달라는 전언을 끝으로, 토마스는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5분.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이 나기 위해서는 고작 1~2분이면 충분하다. 그런고로 토마스는 보호자가 없어 극도로 예민했을 마틴을 지나치게 오래 내버려둔 것이 된다. 숨을 헐떡이며 유치원에 도착한 토마스를 맞이한 것은 무시무시한 소음이었다. 하필 소리는 마틴이 기다리고 있을 별님반 쪽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토마스는 신발을 벗을 겨를도 없이 유치원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마틴!!”
새하얀 새끼호랑이가 조그만 새끼 너구리를 찍어누르고 목을 물어뜯기 직전이었다. 머리카락을 적시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선을 타고 떨어지기도 전에 토마스는 몸을 던졌다. 손을 뻗어 너구리를 감싸자 새끼 맹수의 얇고 날카로운 발톱이 토마스의 손등을 찢었다. 폭신한 유아용 카페트 위로 새로운 선혈이 더해졌다. 너구리 역시 놀라 발버둥치며 토마스의 목덜미와 턱을 할퀴었다. 토마스는 주저없이 너구리를 품에 안고 웅크렸다. 크아악! 어설프지만 날카로움 외침. 그리고 누군가 허둥지둥 토마스의 얼굴을 감쌌다. 토마스씨? 괜찮으세요? 얼굴을 익힌 유치원 교사 중 하나였다. 토마스는 헐떡이며 주변을 살폈다. 새끼호랑이는 유치원 교사의 손에 목덜미를 잡혀 대롱대롱 들려있었다. 토마스는 손가락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선생님, 마틴이, 마틴이 다쳤어요. 구급약, 아니, 병원……!”
“진정하세요! 괜찮아요. 애들은 이정도 다툼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마틴도 괜찮아요! 애들보다 토마스씨가 더 상처가 심하다구요!”
마틴은 괜찮다. 마틴은…….
“마틴……?”
토마스의 품에 웅크리고 있던 너구리가 고개를 들었다. 토마스는 너구리의 귀와 밟혀있던 목덜미, 배, 등에 꼬리까지 빠짐없이 살폈다. 드문드문 생채기가 생겨 털이 젖어있긴 했지만 유치원 교사는 두세시간이면 나을 수준이라며 토마스를 안심시켰다. 호흡이 점차 안정되었다. 뒤늦게 손등과 목덜미를 비롯한 이곳저곳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토마스는 마틴을 끌어안았다. 머뭇거리던 유치원 교사는 구급상자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정말 다행이야…….”
토마스는 작고 복슬복슬한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무엇보다 마틴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푹 놓였다.
소독약과 연고, 반창고로 수습된 토마스의 몰골은 거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사람을 방불케 했다.
‘설마 볼까지 할퀴어졌을 줄은 몰랐는데.’
토마스는 흉터에 대한 우려보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자지러지게 우는 마틴을 달래느라 진을 빼야 했다. 게다가 그 다음날 아침, 하루만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린 하랑이 마틴을 데려온 토마스에게 다가와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잘못했다며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사건사고의 틈새에서 토마스는 잠시 티엔을 잊었다.
토마스에게서 티엔의 기억을 일깨운 것은 마틴의 부모가 전해준 티엔 정의 성년식 소식이었다. 이제는 장성한 청년이 되었다며 축하용 선물을 고르고 있다는 그들 부부의 말에 토마스는 좀처럼 어른이 된 티엔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수인의 육체적 성장은 마음의 성장과 비례한다. 정신적 성숙이 빠르다면 일주일 내에도 어른이 될 수 있고, 정신적 성숙이 느리다면 몇십, 몇백년이 걸려서도 아이로 남을 수도 있다. 처음 듣는 일도 아니건만 토마스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몇 년 동안 조금도 자라지 않던 마틴이 토마스를 만난 뒤부터 인간 아이들과 비슷한 성장 속도를 보이기 시작했다며, 그들 부부는 토마스에게 그가 오기 전까지 품고 있던 고민에 대해 고백했다. 감사와 겸양을 끝으로 괘종시계가 울었다. 이제 마틴이 유치원에 갈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우울해하는 마틴을 등에 업고 유치원으로 향하던 토마스는 티엔과 마주쳤다. 성장成長을 기념하기 위해서인지 성장盛裝을 갖춘 티엔은 토마스보다 더욱 깊은 원숙함을 풍기는 성인이 되어있었다. 티엔은 말없이 손을 뻗어 토마스의 뺨에 붙은 반창고를 어루만졌다. 그리곤 토마스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손을 거두고 가벼운 목례를 남긴 뒤 토마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저 토마스를 기다리는 것이 목적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미련없는 태도에 토마스가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와중에 업혀있던 마틴이 토마스의 재킷 어깨선을 꾹 움켜쥐었다. 아차, 이러다 지각하겠네. 토마스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라붙는 잡념은 좀처럼 떨궈지지 않았다. 마틴도 저렇게 순식간에 자라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마틴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지혜롭게 대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져있던 토마스는 젖살이 채 가시지 않은 마틴의 얼굴에 심상치 않은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물며 티엔과 맞닥뜨린 직후부터 마틴이 티엔을 사납게 노려보았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할 터다.
*
마틴은 토마스가 완전히 잠들었다는 확신이 든 뒤에야 살짝 눈을 떴다. 밤이 깊었고, 침실에는 마틴과 토마스 뿐이다. 게다가 같은 침대에, 같은 이불을 덮고 있는 이 시간이, 마틴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틴 챌피는 지나치게 빨리 능력이 개화한 케이스였다. 자제력이 부족한 유소년기 시절에 강제로 들려오는 타인의 속마음은 결코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없다. 마틴은 극도로 예민해졌고,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다섯 살 무렵에 모든 성장이 멎었다. 부모를 비롯한 모든 어른이 마틴을 ‘걱정’했다. 차라리 외딴 섬에 홀로 버려두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걱정 아래 파묻힌 불안한 미래의 이미지는 마틴을 더더욱 괴롭혔다. 그러던 와중에 토마스가 나타났다. 마틴은 부모의 품에서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골랐다. 수인 역시 어리면 어릴수록 직감이 발달해있다. 마틴은 이력서 더미가 반쯤 무너질 때 까지 방치하다가 그 사이에서 한 청년의 이력서를 잡아 빼 품에 안았다. 그 이력서의 주인이 바로 토마스 스티븐슨이었다. 면접은 사실상 토마스를 납득시키기 위한 의례적인 절차였을 뿐이다.
마틴의 선택은 정확했다.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있노라면 콩콩 뛰는 심장박동 소리와 더불어 따스한 심상이 흘러들어온다. 토마스의 애정이 마틴을 안정시키고 토마스의 칭찬이 성장에 대한 마틴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어린 마틴은 토마스를 기쁘게 하고 싶어 열심히 노력했다. 토마스는 마틴의 성과보다 마틴의 노력을 먼저 칭찬했다. 그때마다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었지만, 마틴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뺨이 발갛게 달아 토마스에게 안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토마스. 토마스 스티븐슨. 마틴은 잠든 토마스의 입술에 아주 살짝 입을 맞췄다. 이 사람을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게 자라면 된다. 한번이지만 스스로 성장을 멈추어보았던 마틴에게는 성장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그것은 좋지만은 못한 방법이었다. 토마스에게는 토마스만의 삶이 있다. 그의 부모, 그의 친구, 그의 자리. 게다가 인간은 수인과는 다른 시간대를 산다.
게다가 토마스는 마틴의 청혼조차 거절하지 않았던가.
물론 어린 아이, 그것도 피보호자의 청혼은 농담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 정도는 마틴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잘 먹고 잘 자서 쑥쑥 자란다면 생각해보겠다며, 그야말로 아무렇지 않게 마틴을 절망시켰다. 마틴은 일생의 남은 모든 시간을 토마스와 함께하고 싶었다.
마틴은 다시금 토마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토마스는 잠결에도 마틴의 등을 다독이고 팔을 내어주었다. 마틴은 토마스의 품에서 깊게 숨을 삼켰다. 아주 조금, 눈물이 나왔다.
*
정신없이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토마스의 잠을 몰아냈다. 협탁을 더듬어 자명종을 끈 토마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꿈을 꾸었다. 그 아이가 나오는 꿈.
꿈에 나온 아이는 이번에도 역시 울고 있었다. 헤어지던 날에 울던 모습이 어지간히 기억에 남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6개월만에 여덟살 초등학생만큼 자라났다. 아이의 부모는 계약 연장을 원치 않았고, 토마스 역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콧잔등에 주근깨가 도드라지기 시작한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꼭 찾아갈거라고, 반드시 다시 만나자고. 아이를 달래는 내내 토마스 역시 코끝이 시큰했다. 6개월간 친동생처럼 보살폈던 아이와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토마스에게도 벅찬 것이었는데 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토마스는 애써 즐거운 생각을 곱씹으며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자명종 때문에 깨어난 김에 겸사겸사 일찍 하루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마틴과 헤어져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식욕과 피로를 어느정도 해결한 토마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통장 정리였다. 마틴을 돌보는 내내 은행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탓에 토마스는 암산으로 통장에 이체되어있을 계약금을 헤아렸다. 토마스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기계에게서 통장을 받아들 수 있었다. 따끈따끈한 통장은 친절하게도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약간 멍한 기분으로 통장 잔고의 자릿수를 세던 토마스는 뭔가 크게 잘못된게 아닐까, 생각했다. 0이 지나치게 많았다. 토마스는 통장에 코를 묻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다시금 잔고를 헤아렸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토마스는 황급히 통장에 이체된 거래 내역을 훑었다. 액수 자체는 규칙적으로 들어온 월급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중간중간 보너스처럼 들어온 금액들이 압도적인 횟수로 6개월치의 월급을 누르고 있었다. 보너스 금액들의 이름은 각각 종이접기 교육비, 밤산책, 편식교정, 풍선놀이…… 등등 이었다.
세수를 하던 토마스는 눈가가 뜨끈해지자마자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찬물 방향으로 확 틀었다.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아직도 멀었던 모양이다. 어느정도 눈의 부기를 가라앉히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던 토마스에게 초인종이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네, 나가요.”
부모님은 손님이 온다는 말은 없으셨는데. 토마스는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밀었다. 문 밖에는 선명한 금발의 청년이 서 있었다. 토마스의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없다. 아직 그 뒤로 세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마틴?”
청년은 활짝 웃으며 토마스를 품에 안았다. 익숙한 젖내 대신 체향과 섞인 엷은 남자 향수 냄새가 풍겼다. 마틴은 토마스와 입을 맞췄다. 그가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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