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란 머리카락 한줌을 전해 받은 소국은 간밤에 발칵 뒤집힌 모양이었다. 아직 새벽의 푸른 기도 거의 가시지 않았는데 벌써 사신이 도착했다. 심지어 항복문서를 들고 온 사람은 토마스의 숙부라고 했다. 꼬박 밤을 새운 히카르도는 시간이 되자마자 사신을 들였다. 사신은 깊게 허리를 숙이고 항복문서를 바쳤다. 하룻밤 사이에 수도를 빼앗겼고 가장 공들여 도망친 왕손은 납치당했다는 사실마저 한줌의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앞서 정복당한 나라들은 가혹한 대우 없이 천천히 제국에 흡수되고 있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항복문서를 읽다가 뒤편에 서있는 가신에게 문서를 넘겼다. 사신은 황제의 시선에 바짝 굳어 마른침을 삼켰다. 육식동물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사신은 황제에게 생포당했을 조카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주눅들어서는 안된다.
“먼저 찾아온 용기가 가상하니 공국으로나마 형태는 남겨주마.”
뜻밖의 희소식이었으나 사신은 순진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정치에서 순수한 호의라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황제는 나라의 이름을 유지시켜주는 대신 무엇을 빼앗아 갈 것인가?
“그래도 후궁의 첫 주인이 될 오메가의 출신국인데 그 정도는 해줘야겠지.”
황제는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사신은 발밑이 꺼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폐하. 그 아이는 아직 발현도 하지 못한 아이입니다.”
“발현이 늦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메가는 오메가더군.”
사신은 그제야 황제의 강렬한 존재감 속에서 익숙한 페로몬을 느꼈다. 발현하지 못한 탓에 아직 희미하지만 사신은 결코 잘못 느낄 리 없는 혈육의 페로몬.
“폐하.”
“피곤하군.”
황제는 더 이상 사신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병사 여럿이 사신을 끌어냈다. 병사들은 사신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사신이 타고 온 말 한필과 수행원들, 그리고 엉망으로 다치고 팔에 수갑이 채워진 자들을 떠넘겼다. 토마스를 호위하기 위해 붙여준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도중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성에 도착하신 뒤에 풀어주라는 황명이십니다.”
기사 하나는 그렇게 말하며 사신에게 열쇠꾸러미를 내밀었다. 기사와 병사들의 처참한 몰골을 동정해 미리 수갑을 풀어줬다가는 반역 혐의를 뒤집어쓸 수도 있다. 사신은 탄식을 삼키며 열쇠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말을 탄 사신의 뒤로 수갑에 묶이고 사슬로 연결된 이들이 뒤따랐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
비어있던 후궁에 새 주인이 생긴 이후로 황제는 극도로 날을 세웠다. 가장 먼저 후궁의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경비들 중 알파들과 본딩 되지 않은 오메가들이 다른 궁으로 일터를 옮겨야 했다. 동시에 경비의 수가 다섯배로 늘었다. 황제가 지내는 본궁보다 후궁의 경비가 훨씬 삼엄한 사태에 많은 신하들이 고개를 저었으나 그들은 감히 황제에게 쓴소리를 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본딩할 수 없는 오메가를 반려로 둔 알파의 불안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황제가 가져온 연이은 승리와 부富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선례와 전례를 목숨처럼 따르는 보수적인 이들조차 이번만큼은 한 걸음 물러났다.
토마스는 황궁에 도착한지 나흘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이미 토마스의 세계는 후궁의 넓이만큼 축소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