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마을에서 히카르도는 어린아이 하나를 주웠다. 그들 사이에서 먹이 겸 직접 인간을 기르는 일은 꽤 흔한 일이었으나, 소식을 들은 까미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히카르도를 한참 응시했다.
“‘그것’에 정 주지 마.”
“쓸데없는 소리.”
“하긴, 너를 걱정 할 필요는 없겠지.”
먹이를 사랑하는 포식자는 없다. 히카르도는 약간의 불쾌감과 함께 악우의 조언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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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아이는 히카르도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작았다. 히카르도는 그 무렵의 아이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주운 인간 아이였을 뿐이다. 그러나 조그만 아이가 보랏빛으로 변색된 손을 암팡지게 잡고, 눈을 마주치고, 그의 무릎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을 무렵 히카르도는 폐허가 된 마을에 다시 한 번 방문했다. 그는 아이를 발견한 집을 샅샅이 뒤져 한 줌의 이름을 찾아냈다.
토마스.
히카르도는 그제야 아이에게 이름을 불러주었다. 토마스가 잘 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왔고, 손수 머리를 빗겨주었으며, 밤에 읽어줄 동화책으로 서가를 가득 채워주었다.
누군가 물어보았다면 히카르도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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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살점이나 혈액 따위의 신체 일부를 조금씩 먹여가며 키운 인간은 성년이 될 무렵 훌륭한 먹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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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 히카르도는 토마스에게 단 한 번 화를 낸 적이 있다. 토마스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았다. 히카르도는 사진 속에 갇힌 세상을 가득 선물했다. 사진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서리가 곱게 닳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날
“마법사님이랑 같이 탑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아이의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였다.
“--.”
그리고 아이가 뭐라고 말했더라?
히카르도는 북풍처럼 분노했다. 불사의 마법사가 터뜨리는 분노에 탑의 모든 것이 몸을 떨었다. 너는 나갈 수 없다. 절대 허락하지 않아. 너는 탑에서 태어났고 탑에서 죽을거다. 용암같은 분노는 격렬했던 만큼 순식간에 식었다. 토마스는 생전 처음 보는 어떤 것을 보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나의 침묵 끝에 히카르도는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과, 사과를 해야한다. 히카르도는 작은 인간 아이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히카르도는 어렵게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해요.”
조그만 손이 히카르도의 망토 자락을 잡았다.
“죄송해요. 마법사님. 화내지 말아요.”
토마스는 울음 없이 히카르도를 끌어안았다. 이제 토마스의 머리는 마법사의 가슴 부근에 닿는다. 히카르도는 두 팔을 쓸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굳어있다가 느리게 어린 소년을 끌어안았다.
모서리가 곱게 닳은 사진집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그는 어린 소년이 천성을 포기하면서까지 그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정한 아이는 슬펐을 것이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카르도는 토마스가 탑에 남기로 결정했음에 더욱 큰 의미를 두었다. 결정의 이유가 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동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토마스를 탑 안에 가만히 가둬둘 수만 있다면 동정을 받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소년은 영원히 그의 소년일 것이다.
소극적으로 소년에게 다가가는 죽음만 저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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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시간에 짓눌려 무뎌졌던 그에게 새로운 감정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히카르도는 저열하고 사나운 충동을 차마 사랑이라 명명할 수 없었다. 토마스를 조금이라도 더 살릴 방법을 찾아 헤메며, 히카르도는 종종 악우의 충고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예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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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역시 탑 안의 것이었다. 마법사는 토마스가 쑥쑥 성장하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살 수 있었다. 토마스와 달리. 토마스는 약간 이르게 다가올 끝에 대해서는 담담했다. 다만 마법사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늘 외롭고 슬퍼보여서, 토마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의 얼굴에서 어두운 것들을 모두 걷어주고 싶다 생각했다.
토마스가 진저리가 나도록 복잡하고 긴 연명치료를 받아들인 것은 그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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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르도가 사용한 수백의 약재와 수천의 처치가 효과가 있었는지 토마스는 성년을 넘겼다. 그러나 그것이 고작이었다. 토마스는 피를 토했고,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며, 때로는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비탄과 후회의 나날은 침묵으로 점철되었다.
“마법사님. 왜 먹지 않아요?”
세계가 부서졌다. 아니, 부서진 것은 히카르도의 세계였다. 어떻게 알고 있지? 히카르도는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고작이었건만 토마스는 어렵지 않게 그의 마음을 알아챘다.
“예전에,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마법사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토마스는 잡아먹힐 것을 알면서도 그의 피와 살점을 받아먹었다. 히카르도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토마스는 손을 뻗어 히카르도의 손 위에 얹었다. 미지근한 체온이 보랏빛으로 변색된 손을 적셨다. 토마스는 느린 호흡으로 말을 이었다.
“마법사님. 그때 그런걸 먹이지 않으셨다고 해도 저는 몇십년이 지나면 여기에 없었을거예요.”
히카르도는 토마스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마법사님이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맥없이 옹송그려지는게 고작이던 손이 히카르도의 손을 잡았다.
“이 방법밖에는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토마스는 실낱같은 힘을 다해 히카르도를 품에 안았다. 토마스의 힘에 저항하지 못한 히카르도가 안기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토마스는 만족스러운 듯 언뜻 웃었다. 히카르도는 익숙한 체향이 풍기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더이상 아프지 않게 해주실래요?”
히카르도는 거절할 수 없었다.
*
20년 남짓 동안 아무도 침범하지 못했던 탑이 하룻밤 사이에 불이 나 무너졌다. 혹자는 맹수의 포효를 들었다 하고, 혹자는 탑이 있던 방향을 등지고 걸어가던 낯선 청년을 보았다고 했다.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탑이 있던 자리로 몰려갔지만 그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깨진 벽돌조각과 잿더미들이 고작이었다.
새파란 머리카락 한줌을 전해 받은 소국은 간밤에 발칵 뒤집힌 모양이었다. 아직 새벽의 푸른 기도 거의 가시지 않았는데 벌써 사신이 도착했다. 심지어 항복문서를 들고 온 사람은 토마스의 숙부라고 했다. 꼬박 밤을 새운 히카르도는 시간이 되자마자 사신을 들였다. 사신은 깊게 허리를 숙이고 항복문서를 바쳤다. 하룻밤 사이에 수도를 빼앗겼고 가장 공들여 도망친 왕손은 납치당했다는 사실마저 한줌의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앞서 정복당한 나라들은 가혹한 대우 없이 천천히 제국에 흡수되고 있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항복문서를 읽다가 뒤편에 서있는 가신에게 문서를 넘겼다. 사신은 황제의 시선에 바짝 굳어 마른침을 삼켰다. 육식동물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사신은 황제에게 생포당했을 조카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주눅들어서는 안된다.
“먼저 찾아온 용기가 가상하니 공국으로나마 형태는 남겨주마.”
뜻밖의 희소식이었으나 사신은 순진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정치에서 순수한 호의라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황제는 나라의 이름을 유지시켜주는 대신 무엇을 빼앗아 갈 것인가?
“그래도 후궁의 첫 주인이 될 오메가의 출신국인데 그 정도는 해줘야겠지.”
황제는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사신은 발밑이 꺼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폐하. 그 아이는 아직 발현도 하지 못한 아이입니다.”
“발현이 늦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메가는 오메가더군.”
사신은 그제야 황제의 강렬한 존재감 속에서 익숙한 페로몬을 느꼈다. 발현하지 못한 탓에 아직 희미하지만 사신은 결코 잘못 느낄 리 없는 혈육의 페로몬.
“폐하.”
“피곤하군.”
황제는 더 이상 사신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병사 여럿이 사신을 끌어냈다. 병사들은 사신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사신이 타고 온 말 한필과 수행원들, 그리고 엉망으로 다치고 팔에 수갑이 채워진 자들을 떠넘겼다. 토마스를 호위하기 위해 붙여준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도중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성에 도착하신 뒤에 풀어주라는 황명이십니다.”
기사 하나는 그렇게 말하며 사신에게 열쇠꾸러미를 내밀었다. 기사와 병사들의 처참한 몰골을 동정해 미리 수갑을 풀어줬다가는 반역 혐의를 뒤집어쓸 수도 있다. 사신은 탄식을 삼키며 열쇠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말을 탄 사신의 뒤로 수갑에 묶이고 사슬로 연결된 이들이 뒤따랐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
비어있던 후궁에 새 주인이 생긴 이후로 황제는 극도로 날을 세웠다. 가장 먼저 후궁의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경비들 중 알파들과 본딩 되지 않은 오메가들이 다른 궁으로 일터를 옮겨야 했다. 동시에 경비의 수가 다섯배로 늘었다. 황제가 지내는 본궁보다 후궁의 경비가 훨씬 삼엄한 사태에 많은 신하들이 고개를 저었으나 그들은 감히 황제에게 쓴소리를 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본딩할 수 없는 오메가를 반려로 둔 알파의 불안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황제가 가져온 연이은 승리와 부富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선례와 전례를 목숨처럼 따르는 보수적인 이들조차 이번만큼은 한 걸음 물러났다.
토마스는 황궁에 도착한지 나흘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이미 토마스의 세계는 후궁의 넓이만큼 축소된 뒤였다.